이재용 요구받은 ‘미국식 준법감시’, 법적 근거 없으면 무용지물

이범종 기자2019-11-05 01:23:00
정준영 부장판사 “미국 준법감시제도 참조” 훈계 美식 컴플라이언스 기준 형량 모호…기업-정부 머리 맞대야

서울 서초동 법원종합청사. [사진=이범종 기자]

[데일리동방] 법원이 삼성에 요구한 ‘미국식 준법감시제도 도입’이 책임 떠넘기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입법・사법・행정부가 명확한 양형・기소 원칙을 세워야 기업도 효과적인 범죄 예방 장치를 만들 수 있다는 의미다.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는 지난달 25일 이재용 부회장에게 “미국 연방정부와 미국 대기업 준법감시제도를 참고하라”고 충고했다. 기업 총수와 대통령이 무서워할 정도의 기업 내 준법 감시 제도가 있었다면 삼성이 국정농단에 휘둘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정권 압력에 굴하지 않는 예방책

국회와 정부는 총수 범죄 예방책으로 상법 개정과 취업 제한 등 사후대책을 내놓고 있다. 바른미래당 채이배 의원이 지난해 9월 대표 발의한 상법 개정안은 주주총회 소집 공고 시 임원 후보자의 약력과 범죄 관련 사항을 통지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달 8일부터는 총수 일가가 범죄 행위로 손해 입힌 자기 회사에 취업하지 못하는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이 효력을 발휘한다. 횡령・배임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취업이 제한되는 곳이 현행 ‘재산상 이득을 취한 기업체’에서 ‘재산상 손해를 입은 기업체’로 넓어진다. 개정안 시행 이후 경제 범죄를 저질러 형이 확정된 사람부터 적용된다.

반면 정 부장판사의 훈계는 사후 대책이 아닌 강력한 컴플라이언스(Compliance)를 가리킨다. 이는 법규나 모범기준 위반을 방지하려는 기업의 지속적인 노력이다. 법 집행 당국을 납득시키려 채택하는 정책・통제체계다.

누구보다 효과적인 컴플라이언스를 원하는 쪽은 정권의 압력에 노출돼온 기업이다. 한태영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총수는 자기 의사결정에 따른 법적 위험을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압박이 들어와도 리스크를 걸러주는 체계가 있다면 이 점을 근거로 거절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이 같은 컴플라이언스의 조건으로 구체적인 양형 기준과 제도적 뒷받침이 거론된다. 조창훈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컴플라이언스&윤리전공 주임교수는 행정・사법 당국의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으로 기업 자율규제 수준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이 사내 가이드라인으로 출발했다. 이후 기업이 준수하면 선처해주는 국가 정책과 맞물려 자율규제를 극대화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달 25일 자신의 재판을 마치고 법원을 나서고 있다. [사진=이범종 기자]

◆노력하면 선처하는 선순환 컴플라이언스

미국은 한국처럼 상법에 준법감시인과 준법지원인을 직접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1991년 ‘미 연방 기업범죄 양형 가이드라인’을 법제화하고 2004년 개정해 법규 위반 방지 프로그램에 동기를 부여했다. 기업 내부에 효과적인 컴플라이언스와 윤리 프로그램이 운영중일 경우 형을 감경한다. 가이드라인이 정한 효과적인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은 ▲가이드라인과 절차 ▲경영진 리더십과 컴플라이언스 문화 ▲컴플라이언스 체계 운영을 위한 합리적 노력 ▲가이드라인 절차 교육과 의사소통 ▲프로그램 유효성에 대한 모니터링과 감시・평가 ▲운영 성과에 대한 인센티브와 징계 ▲위법 행위 대응과 시정 조치 등 7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검찰에서도 한국에 없는 기소유예 합의제도가 활용된다.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은 면책 내지 책임 조각 사유가 되기 때문에 형법 적용이 구체적이어야 한다. 미국 법무부는 기업이 ▲법 위반을 신속하고 자발적으로 공개해 검찰 조사에 협조하는지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이 시행중이고 효과는 어떤지 ▲책임 있는 경영진 교체가 있는지 ▲법 위반 행위자에 대한 제재 수위는 어떤지 등을 고려해 기소한다.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기업에 대해서는 기소유예 합의나 불기소 합의, 보호관찰기간 부과 등으로 해결책을 찾는다. 기소유예 합의를 하면 검찰이 법원에 공소장을 내면서 재판의 진행을 연기시킨다. 기업이 검찰과 합의한 컴플라이언스 이행조건을 충실히 이행해야 기소가 취소된다.

대표적인 예가 2013년 유전회사 웨더포드의 FCPA(해외부패방지법) 위반에 대한 처분사례다. 웨더포드는 해외 현지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공여한 혐의를 인정하고 미 법무부와 기소 연기에 합의했다. 이후 벌금 8720만달러를 내고 최소 18개월간 외부 감독관의 효과적인 컴플라이언스 준수 여부 모니터링을 받기로 했다.

◆컴플라이언스 기준 없던 법원 훈계는 ‘모순’

반면 한국은 상법이 제시하는 ‘상당한 주의와 감독’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애매하다. 현행법에 따르면 자산총액 5000억원 이상인 상장회사는 변호사 자격을 가진 준법지원인을 1인 이상 두고 준법통제기준 준수 여부를 이사회에 보고해야 한다. 회사 대표 등 관계자가 특수관계인이나 이사, 감사 등에 신용공여했을 경우 그와 회사 모두 같은 액수의 벌금을 내야 한다. 다만 회사의 상당한 주의와 감독이 인정된다면 회사는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미국처럼 구체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기업은 불안해진다. 이 때문에 기업은 상당한 주의와 감독을 어떻게 입증해 검찰과 법원에 항변할 지 막막하다. 형법상 명확성 원칙에 문제를 가진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행정부와 사법 당국이 기업에 전문성 있는 피드백을 줘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래야 기업이 호응해 컴플라이언스에 투자한다는 설명이다.

조 교수는 “아직까지 금융감독 당국과 공정거래위원회, 법무부와 법원도 기업 범죄 행위를 판단할 때 효과적인 기업 컴플라이언스 인정 여부에 대한 나름의 객관적인 기준도 정립하고 있지 않다”며 “이번에 법원에서 사실상 양형 결정이 남은 기업 범죄 재판 심리 중에 ‘재벌 총수도 두려워할 수 있는 효과적인 컴플라이언스를 정립하여 운용하라’고 훈수를 두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꼬집었다.

흩어진 기업 범죄 관련 법규들을 하나의 통합법 또는 백서 등으로 정리해 기업 범죄 관련 사항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필요성도 거론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