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관객석에서]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 휴먼 푸가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전성민 기자
2019-11-12 07:01:00

5·18 민주항쟁 다룬 한강 소설 원작…연극 '휴먼 푸가'

배우들 몸짓과 오브제로 표현한 '1980년 이후 광주'

'휴먼 푸가' 공연 장면. [사진=서울문화재단 제공]

원작 소설 ‘소년이 온다’를 읽지 않고 객석에 앉았다.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지 하며 걱정했다.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연극 ‘휴먼 푸가’는 역사적 아픔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그저 눈 앞에 펼쳐진 것들을 오감으로 느끼면 됐다. 배우들이 전하는 표정과 몸짓 그리고 대사들이 너무도 생생히 전달됐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먹먹함이 계속 밀려왔다.

서울문화재단(대표이사 김종휘) 남산예술센터는 오는 17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창작집단 ‘뛰다’와 공동 제작한 ‘휴먼 푸가’를 공연한다.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이 2014년 여섯 번째로 쓴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2014)가 원작이다. 이 소설을 무대화하는 것은 국내에서 이번이 처음이다.

원작은 1980년 5월 계엄군에 맞서 싸운 이들과 남겨진 이들이 갖고 있는 고통을 그린다. 사건 하나가 낳은 고통이 여러 사람들 삶을 통해 변주되고 반복되고 있는 소설 구조는 독립된 멜로디들이 반복되고 교차되고 증폭되는 ‘푸가(fuga)’ 형식과 맞닿아 있다. 한강 작가는 이 소설을 연극과 오페라 등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많이 들었지만 이전까지는 모두 거절한 것으로 전해졌다.

‘소년이 온다’를 무대에 올리기로 결정하기까지 배요섭 연출은 한강 작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작품을 올리기로 결정된 후에도 배 연출은 ‘소설로 충분한 데 굳이 연극으로 만들 필요가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야 했다.

지난 6일 첫 공연을 올린 ‘휴먼 푸가’를 보면서 배 연출이 찾은 답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소설 속 언어를 무대로 옮긴 작품이지만 국가가 휘두른 폭력으로 인해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들이 한 증언을 단순 재현하지 않았다. 배우들은 연기하지 않고, 춤추지 않고, 노래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겪었을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역사적인 아픔과 관객들을 잇는 다리 역할을 바랐다.

이를 위해 1980년 이후 광주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배우 공병준·김도완·김재훈·박선희·배소현·양종욱·최수진·황혜란과 제작진은 지난 1월 한강 작가와 만남 이후,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폭력이 갖고 있는 모습을 제대로 마주보기 위해 몇 차례 광주를 방문해 자료를 조사했다. 국립 5·18 민주묘지와 옛 전남도청 등을 찾았고 문헌자료·영상자료 등을 통해 간접 경험했다.

배우들은 각자 움직임을 만들고 오브제를 스스로 찾아냈다. 공연에는 밀가루·책과 롤러·동전·볼펜·올벼쌀·유리병·테이프·물·의자·소창·오동나무 판 등이 등장한다. 영혼을 표현하는 밀가루나 5·18기록관에 전시됐던 테이프 등이 무대 위에서 훌륭한 소재가 됐다. 배소현은 보는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는 경험과 정서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른 상상을 할 수 있는 유리병을 오브제로 선택했다. 무대 위 수많은 유리병은 다양한 상상을 만들었다.

배 연출은 “이미 소설로 충분한 작품을 연극으로 올리는 것은 사회적 고통을 기억하고, 각인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이다”라고 밝혔다.

‘휴먼 푸가’는 고통이 갖고 있는 본질에 다가가며 인간이 참혹함에서 존엄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를 모색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대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인류가 가진 잔혹성은 전 세계가 고민하는 부분이다. ‘소년이 온다’는 지난 6월 ‘더 보이 이즈 커밍(The Boy is Coming)’이라는 제목으로 폴란드 스타리 국립극장에서 공연됐다. 유럽에서 현지 연극인에 의해 처음으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공연이 무대에 올랐다.

한국과 폴란드는 집단학살을 경험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닮았다. 폴란드에서는 1981년 계엄령이 선포됐다. 남산예술센터는 202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해 5·18 정신과 가치를 확산하고 공유할 수 있도록 양국에서 제작한 공연을 교류할 계획이다.
 

'휴먼 푸가' 공연 장면 중 울부 짓는 김도완(ⓒ이승희) [사진=서울문화재단 제공]

'휴먼 푸가' 공연 장면(ⓒ이승희) [사진=서울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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