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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과 인재 남기고 떠난 자연인 구자경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범종 기자
2019-12-14 15:26:05

'강토소국 기술대국' 신념, 화학∙전자 산업 기틀 마련

1995년 창업세대 원로와 동방퇴진 후 자연인 삶

1970년 1월 취임 당시의 구자경 명예회장. [사진=LG 제공]

14일 눈 감은 상남(上南) 구자경(具滋暻・94) LG그룹 명예회장은 기술과 인재 경영으로 오늘날 LG그룹 기틀을 세웠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1925년 경남 진주시 지수면에서 구인회 LG 창업주의 6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 졸업 후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던 1947년 부친이 세운 LG 모기업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 일손이 달리자 낮에는 부산사범학교에서 교사 일을 하고 밤에는 회사 업무를 도왔다. 결국 1950년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도우라는 부친의 부름에 교편을 놓고 기업인의 길을 걷게 됐다.

◆아버지와 초창기 LG 함께 만든 1.5세

구 명예회장은 럭키크림 화장품 생산을 직접 맡으며 현장 경험을 쌓았다. 이사 직함을 달았지만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었다. 제품을 일일이 상장에 담아 판매 현장에 들고 나갔다. 하루 걸러 숙직하고 오전 5시 반에 몰려오는 도매상을 맞았다.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 가동을 몸소 준비했다. 창업주와 함께 회사 기초를 닦은 1.5세로 불리는 이유다.

설비 점검과 기계 발주 등 공장 신・증축을 해내면서 그는 화학・기계・전기 관련 지식과 경험을 쌓게 됐다. 이는 훗날 화학과 전자 산업을 키우는 바탕이 됐다. 당시 구 명예회장은 납 표면에 주석을 입혀 인쇄하는 치약 튜브 생산 방식에 한계를 느끼자 과거 공장에서의 도금 경험과 주변 기술자들로부터 들은 단편적 기술들을 모아 냉간 압착 튜브 코팅 기술을 개발해냈다.

크림 화장품 배달 과정에서 뚜껑이 파손되자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크림통 뚜껑 개발에 참여하기도 했다. 락희화학 때의 플라스틱 가공 경험은 훗날 금성사 성장에 디딤돌이 됐다. 구 명예회장은 플라스틱 가공에 필수적인 자체 금형 기술 확보와 인력 양성에 관심을 쏟았다. 이때 축적된 금형 역량으로 LG는 라디오와 선풍기, 모터 등 당시 높은 정밀도가 요구된 전자제품 금형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사진=LG그룹 제공]

◆기술과 인재에 투자 또 투자

구자경 명예회장은 ‘강토소국 기술대국(疆土小國 技術大國)’ 신념으로 화학∙전자 산업의 기틀을 세웠다. 구 명예회장은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하여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사업보국(事業報國) 조건은 기술력이라는 신념이었다. 작물을 가꾸는 방법에 따라 열매의 크기와 수확량이 다르다는 점을 관찰한 그는 교직생활 당시에도 제자들에게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기술개발 연구에 대한 구 명예회장의 열정은 남달랐다. 1970년대 중반 럭키 울산공장과 여천공장은 가동 전에 연구실부터 지어졌다. 구 명예회장은 공장 별 소규모로 운영되는 연구실에 한계를 느끼고 1976년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이곳에 개발용 컴퓨터와 만능 시험기, 금속 현미경, 고주파 용해로 등 첨단 장비가 설치됐다. 국내외 우수 연구진도 초빙하며 파격 투자를 시작했다. 1974년 금성사에 디자인연구소, 1979년 대덕연구단치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1985년에는 금성정밀과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회장 재임기간 동안 연구소 70여개를 세웠다. 중국과 동남아시아, 동유럽, 미주지역 등에 LG전자와 LG화학 해외 공장 건설을 추진해 세계적 기업의 주춧돌을 세웠다. 기술 연구에 열정이 컸던 그는 1994년 11월 나흘간 전국 LG그룹 소속 연구소 19곳을 둘러봤다. 구 명예회장은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찼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룹의 영속 발전을 위한 인재 양성기관 ‘LG인화원’도 구 명예회장이 1988년 세웠다. 인화원은 이론 중심이 아닌 실무 실행력 증진에 초점을 맞춰 기존 교육체계를 혁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001년에는 기업 교육과정 우수 사례로 영국 파이낸셜타임즈가 뽑은 세계 12대 기업 대학에 선정됐다.

21세기에 대비해 전문경영인에게 ‘자율과 책임 경영’ 권한을 위임하는 LG 컨센서스(Consensus) 문화를 1988년부터 싹 틔운 공로도 있다. 고객과 사업을 잘 아는 전문경영인이 권한을 갖고 자율적으로 사업하며 결과는 책임지는 방식이다. 자율과 책임 경영 시행 초기 계열사 사장들이 구 명예회장을 찾아가 의사 결정을 요청했다가 질책과 훈계를 듣고 나오곤 했다.

구 명예회장은 1970년대에 잇따른 기업공개로 민간기업의 투명경영을 이끌기도 했다. 기업 공개는 기업 팔아넘기기로 오해 받는 상황이었지만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으로 선진 기업 성장의 필수 단계라는 소신으로 밀어붙였다.
 

1995년 2월,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자경 명예회장(사진 왼쪽)이 고 구본무 회장(오른쪽)에게 LG 깃발을 전달하는 모습 [사진=LG제공]

◆물러날 때를 알았던 선배 경영인...자연인으로 소박한 마무리

그의 파격 경영은 재계 첫 무고(無故) 승계 단행으로 이어졌다. 구 명예회장은 1995년 1월 럭키금성을 LG로 바꿨다. 2월에는 LG와 함께한 45년과 회장으로서 25년 세월을 뒤로 하고 장남 구본무 회장에게 회장직을 넘겼다. 1970년 매출 260억원이던 LG그룹은 이때 30조원 규모로 성장해 있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을 이끈 허준구 LG전선 회장과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동반퇴진해 모범 사례를 남겼다.

은퇴 후 구 명예회장은 자연인으로 살았다. 그는 충남 천안시 성환 소재 연암대학교 농장에 머물며 버섯 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았다. 연암대는 낙후된 농촌의 발전을 이끌 인재 양성을 위해 그가 1974년 설립했다. 1984년에는 우수 기술인력 양성을 위해 경남 진주에 연암공업대학을 세웠다.

그가 스스로 아호를 ‘상남(上南)’으로 지은 이유는 문중에서 항렬이 낮지만 나이가 많은 그를 편히 부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상남은 고향집 앞 증조부인 만회 구연호 공이 놓은 작은 다리인 ‘상남교’에서 따왔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도랑 치고 호롱불을 밝혀 붕어나 미꾸라지를 잡던 추억이 깃든 곳이다.

한편 구자경 명예회장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LG그룹은 "고인과 유족들의 뜻에 따라 가족장으로 최대한 조용하게 차분히 치르기로 했다"며 "유족들이 온전히 고인을 추모할 수 있도록 별도의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하며, 빈소와 발인 등 구체적인 장례 일정도 외부에 알리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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