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삼성·LG·SK 얽히고설킨 영욕의 산업, 반도체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범종 기자
2020-11-01 10:11:00

삼성 이병철 “반도체는 내 마지막 사업”

LG 구본무, 반도체 뺏기고 전경련 발길 ‘뚝’

SK 최태원, 인텔 낸드 인수로 시장 2위에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사진=삼성 제공]

 대한민국의 대표 상품이 반도체를 세계 1위 위상에 올려놓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28일 영면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부친상을 치른 다음날 바로 출근했다.

앞으로 이재용 부회장이 바라보는 창밖의 풍경은 이전보다 흐릿할지도 모른다. 불확실성이 늘면서 위기 아닌 날이 더는 없을 것이다. 특히 할아버지가 결단하고 아버지가 성장시킨 반도체를 키워나가야 할 짐은 막중하기만 하다.

하지만 한국의 자랑이자 숙제인 반도체 산업도 한치 앞을 장담 못할 난관 속에 시작됐다.

◆더 늦기 전에 시작해 초격차 일군 삼성전자

1983년 2월 7일 동경.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창문 너머 흩날리는 진눈깨비를 보며 불안감에 휩싸였다. 매년 일본에서 새해를 맞던 그가 끼니도 거른 채 잠들지 못한 이유는 삼성그룹의 미래를 건 도박 때문이었다. 날이 밝자 그는 수화기를 들고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반도체, 해야겠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이 사실을 공포해주세요.” 훗날 ‘2·8 동경 구상’으로 불린 순간이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사진=삼성전자 제공]


한달 뒤 삼성그룹이 ‘우리는 왜 반도체 사업을 해야 하는가’라는 선언문을 내고 64K 디램 기술 개발 착수도 발표했다. 돌아온 건 냉소와 우려였다. 반도체 사업 조건은 인구 1억명, 국민총생산(GNP) 1만달러, 국내 소비 50% 이상이어야 가능하다는 상식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은 이 조건을 하나도 충족하지 못했다. 앞서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가 1974년 12월 파산 직전인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인수했지만 성과가 미미한 상황이었다. 기술 부족과 자체 설계 부재, 일본의 견제와 자본잠식이 이어졌다. 삼성전자 반도체는 미운 오리 새끼였다.

이에 일본 최고 기업도 힘들어하는 반도체를 어떻게 따라잡느냐는 의문과 3년 안에 망할 것이라는 냉소가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이건희 당시 부회장과 1년 전 미국 IBM과 GE, HP 등을 둘러보며 “늦었다”는 말만 되풀이했던 이병철 회장의 결심은 확고했다. “반도체 사업은 나의 마지막 사업이자 삼성의 대들보가 될 사업입니다.”
 

삼성전자 2020년 3분기 실적. 반도체가 전분기에 이어 18조원대 매출에 5조원대 영업이익을 유지했다. [자료=삼성전자 제공]

반도체 선언 반 년 뒤 세계는 경악했다. 삼성전자가 그해 11월 64K 디램 자체 개발에 성공해서다. 같은 기술 개발에 일본은 꼬박 6년이 걸렸다.

이후 1992년 삼성전자 반도체는 디램 세계 1위에 올랐다. 이건희 회장이 선대 회장 타계로 자리를 이어받은 지 5년만이었다.

이듬해 삼성은 메모리 전체 1위에 올랐고, 1994년에는 세계 최초 256메가 디램 개발에 성공했다. 삼성은 그해 9월 일간지에 구한말 태극기를 걸고 “한민족 세계 재패, 월드 베스트 정신으로 해냈습니다”를 선언했다. 디램 기술에서 한일 관계가 구한말 이전으로 돌아갔다는 암시였다.

이후 삼성은 1995년 S램, 2000년대 플래시 메모리에서 세계 1위를 기록하며 메모리 반도체에서 독보적인 지위를 누리기 시작했다. 삼성을 반도체 강자로 만든 건 이 회장의 직감과 추진력이었다. 그는 한국반도체 인수 당시 “1973년 오일 쇼크에 충격을 받은 후, 한국은 부가가치가 높은 첨단 하이테크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한국반도체 파산 위기를 알았을 때는 “무엇보다 ‘반도체’라는 이름에 끌렸다”고 했다. 오감으로 유망 사업을 간파했다는 뜻이다. 젓가락질처럼 미세하고 신발 벗고 들어서는 청결함이 한국인과 반도체산업을 어울리게 한다는 이론도 덧붙였다.

이병철 회장이 낳고 이건희 회장이 기른 미운 오리는 어느새 백조가 됐다. 시장조사기관 디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2020년 상반기 기준 세계 디램 점유율은 삼성전자가 43.8%에 달한다. 또 다른 조사기관 옴디아는 삼성전자가 2분기 기업형SSD(eSSD) 점유율 34%로 2위 인텔(30%)를 한참 앞지른 것으로 집계했다.
 

SK하이닉스 본사가 있는 경기 이천 공장. [사진=SK하이닉스]

◆LG가 낳고 SK가 키운 하이닉스

최근 인텔 낸드 사업 인수로 주목받은 SK하이닉스 전신은 LG반도체다. 한국 전자산업의 효시로 불리는 LG는 1999년 정부 주도 대기업 사업조정(빅딜)의 희생양이었다. 앞서 LG는 1979년 대한반도체를 인수하고 이듬해 미국 AT&T 합작으로 금성반도체를 설립하며 ‘미래 산업의 쌀’ 농사에 돌입했다. 비메모리 분야에 강했지만 메모리 비중도 늘렸다.

1994년 생산 품목에서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LG가 90%, 삼성이 87%였다. 다만 삼성이 선택한 DDR램이 LG전자의 램버스 디램을 제치고 업계 표준 자리를 꿰찼다. 따라서 정부의 빅딜이 없었도 LG가 사업을 정리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반대로 비메모리 기술력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따라붙는다.

빅딜 당시의 아쉬움은 구본무 당시 회장의 행보로 엿볼 수 있다. 그는 1999년 4월 LG반도체 지분 전부를 현대전자에 넘긴 뒤 14년간 전국경제인연합 행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전경련은 LG반도체 빅딜 실무를 주관하고 평가기관 선정도 주도했다. 본사가 있는 여의도 LG트윈타워와 전경련은 걸어서 20분 거리다.

1999년 김대중 정부에 의해 현대로 넘어간 LG반도체는 2011년 하이닉스가 돼 매물로 나왔다. 하지만 LG에겐 여력이 없었다. 2010년 스마트폰 쇼크 때 유상증자로 자금을 수혈한 상황이었다. 지속적인 대규모 설비투자와 심한 메모리 가격 변동도 걸림돌이었다. 주력으로 자리잡은 디스플레이와 반도체가 함께 하락세를 타면 그룹 전체에 미칠 영향이 컸다.
 

[자료=삼성증권]

오갈 곳 없던 하이닉스를 품에 안은 사람은 ‘행복 경영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었다. 그는 2012년 2월 하이닉스 이천공장과 청주공장에 나타나 “하이닉스가 행복할 때까지 어떤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직접 뛰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SK하이닉스는 1980년 대한석유공사와 1994년 한국이동통신 인수 이후 세 번째 SK그룹 도약의 발판으로 거듭났다.

반면 LG는 반도체로 한 해 수십조원을 벌어들이는 삼성전자와의 격차를 당분간 이어가게 됐다. 그 몫은 SK가 가져갔고, 낸드 시장 2위에 오르게 됐다. 유진투자증권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낸드 시장 점유율은 1위 삼성전자(33.8%), 2위 키옥시아(17.6%), 3위 웨스턴디지털(13.9%)이다. 그 밑으로 SK하이닉스(12.2%)와 마이크론(11.2%), 인텔(10.6%)이 시장을 나누고 있다. 두 회사 낸드 점유율을 합치면 키옥시아를 제치고 삼성에 이어 2위가 된다.

얽히고설킨 영욕의 반도체 산업은 결국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끌게 됐다. 이 때문에 반도체 산업의 가치를 명확히 정리한 어느 경영인의 말이 아쉬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앞으로 전자제품은 반도체 덩어리가 될 테지만 위험부담이나 투자 규모, 기술 장벽 때문에 세계에서 반도체를 만드는 회사는 몇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도체를 파는 기업은 돈을 벌 수 있고, 반도체를 만들지 않고 TV나 VCR 등 최종 제품만 만들어 파는 기업은 돈을 벌 수 없습니다.” 1992년 고 구자경 LG 명예회장이 저서 ‘오직 이 길밖에 없다’에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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