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경제적인 시선

내 노후 금고지기 국민연금이 위험하다

김병수 편집국장입력 2021-06-02 06:10:00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대세로 자리 잡은 ESG 키맨 자처한 국민연금의 적극 행보는 반갑다 그러나 투자 전문가 이탈하고 주니어 운용역도 수혈 못 하고… 노후 밑천 지키는 금고지기가 정치에 휘둘리고 꼼수로 버티고 단기 수익률로 혹세무민하지 말고 스스로 'G'를 돌아봐야
개인이 주식시장에서 직접 투자하는 건 쉽지 않다. 때때로 대박을 터뜨린 사람들이 화제에 오르지만, 현재 시점에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래서 일부 수수료를 떼주더라도 전문가들에게 맡기는 것이 현명하다. 전문가들도 시시각각 변하는 투자 흐름을 파악하고 만족스러운 수익률을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투자시장에서 가장 핫한 주제가 ESG다. 2000년대 초부터 꾸물대더니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제대로 물길을 텄다. 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뜻하는 ESG. 경제 환경이 바뀌었으니 기업 경영에서도 비재무 요소를 더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흐름은 2003년 IT 버블이 꺼지면서 본격화했다. 경제 전문가들은 뉴노멀(New Normal)을 입에 달고 살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따른 글로벌 저성장은 바뀐 경제 환경을 실감하기에 충분했다.

그동안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재무제표에 적힐 매출과 이익만 많으면 됐다. 오·폐수를 무단 방류해 비용을 줄이고, 협력사의 기술을 빼내 제 것인 양 쓰고, 오너가 무슨 허튼짓을 해서 회사에 누를 끼쳐도 장땡이었다. 저성장 시대엔 다르다. 돈을 써서 확장하는 것보다 관리가 중요해진다. 자본의 레버리지를 통한 성장(버블) 방식에 의문을 품기 때문이다.

이런 경제 환경 변화는 단순히 미래 세대를 위해 환경을 보호하고 정직하게 살자는 도덕론(道德論)이 아니다. 기업은 환경과 사회, 지배구조 등에서 생길 위험(Risk)을 줄여 회사가 망하지 않을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는 생각과 맞닿아 있다. 확장하지 말고, 돈을 쟁여두자는 얘기도 아니다. 현재 시점에서 미래의 측정하지 못한 위험에 대비하는 투자가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최근 남양유업 사태는 이런 바뀐 경영 환경을 여실히 보여줬다. 해프닝 같은 발표 하나가 오너의 사퇴와 주식 처분으로 이어졌다. 실제로 회사의 경영권이 넘어간 건지는 두고 볼 일이나, 이전의 비슷한 사례에서 봤던 오너의 사과와 공식 직함 사퇴 수준과는 결이 다르다.

◆전 세계 연기금과 자산운용사가 주도하는 ESG

국내 기업들의 ESG 수준은 아직 선진국에 미치지 못한다. 최근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이 평가한 한·미·일 3국의 등급 현황을 보면, 우리나라는 이들 나라보다 많이 뒤처진다. 삼성조차 AAA 등급이 아니다. 국내 기업들이 매일같이 ESG 관련 보도자료를 쏟아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반성에서 출발한 ESG 투자는 폭발적이다. ESG 펀드에도 자금이 몰린다. 국내 금융사들도 ESG 관련 자금 조달과 투자, 금융상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올해는 ESG 펀드에 벌써 2조원이나 쌓였다.

 

2018년부터 최근까지 5대 금융지주회사와 계열사들의 국내외 채권 발행 규모가 17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산한다. 전 세계 ESG 투자자산 규모는 2012년 13조3000억 달러에서 작년 상반기까지 40조5000억 달러로 3배 넘게 증가했다. 이런 추세라면 2030년엔 130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 글로벌 연기금과 자산운용사들이다. 어마어마한 투자 규모를 자랑하는 이들의 간택을 받지 못하면 기업들의 주가 하락은 불 보듯 뻔하다. 투자자의 구미에 맞추는 것은 상장사들의 숙명이다.

지난달 26일 세계경제연구원 세미나에서 수이 김 캐나다 연금투자위원회(CPPIB) 아시아태평양 대표의 "기업의 재무 성과에 ESG 요소들이 미치는 영향을 구체화하고, 기후변화의 위험과 기회를 시나리오별로 분석해 재무 성과를 전망해야 한다"는 말은, ESG 위험에 따른 영향을 숫자로 증명할 때 투자하겠다는 것으로 들린다.

◆국민연금도 감시자 역할 마다 안 해

국내에선 국민연금이 주목받는다. 국민연금 운용자산은 지난 3월 말 현재 873조원. 국내 주식투자 규모만 179조원으로 시가총액의 7~8%를 차지한다. 국민연금공단 김용진 이사장은 지난달 21일 서울 여의도에서 연 포럼에서 "ESG는 투자와 경영 리스크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수단으로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국민연금 ESG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대한민국 ESG의 표준 또는 기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대부분 나라에서 자본시장 밸류체인(가치사슬)의 최상단은 연기금이다. 자산운용 규모가 그만큼 커서 그렇다. 우리 국민연금도 망망대해에 닻을 올린 ESG라는 거함의 선장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행스럽다.

지난해 국민연금의 수익률은 9.58%다. 요즘 같은 금융환경에서 두 자릿수에 근접한 수익률은 낮지 않은 숫자다. 물론, 코스피는 연간 32%나 오르긴 했다. 코스피가 7% 오른 2019년엔 11% 넘는 수익률을 기록했다. 코스피가 무려 마이너스 17%를 기록한 2018년에는 0.92% 손실로 막아내 노후자금 금고지기 책임을 다했다.
 

 

국민연금의 투자수익률은 보통 마라톤에 비유한다. 단기적으로 수익률을 높게 시현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어떤 특정 주식이 적당히 올랐더라도 앞으로 더 오를 가능성이 높다면 나중에 이익을 시현하는 게 유리하다. 반대로 당장의 수익률 성과가 필요하면 적당히 오른 주식을 팔아 숫자를 확정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 자신의 G(거버넌스)는?

현재 국민연금의 운용 수익률은 낮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요즘 핫한 ESG 관점에서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국민연금 투자 부문에서 가장 논란이 컸던 것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건이 아닐까 싶다. 국민연금은 여기서 전문가들의 논의 결과보다 정권의 입에 맞는 의사결정을 했다.

당시 국민연금 투자 전문가들의 논의에 개입한 보건복지부의 행위는 1·2심에서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국민의 노후자금을 책임지고 굴리는 기금운용위원회(위원장 복지부장관)와 기금운용본부(국민연금공단 본부장)가 투자의 독립성을 훼손해 수익률 극대화라는 목표를 저버렸다.

이런 일은 촛불혁명을 통해 새로 구성됐다는 현 정부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4월 9일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이날 회의에선 국내 주식 보유 비중 이탈 범위를 확대하는 안건이 처리됐다. 알려진 대로 이 확대 방안은 개미(소액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들이며 애국(?) 운동을 하는데, 국민연금이 주식을 내다 판다는 여론에 집권 여당이 호응하면서 시작됐다.

그런데 이 안건을 처리하는 과정이 문제다. 국민연금 투자정책전문위원회(투정위) 전문위원 3명이 의사결정 과정을 비판하며 불참한 가운데 다른 위원회(성과보상) 소속 위원들을 참석시켜 안건을 처리했다. 독립 전문위에서 다른 위원회 위원이 참석해 의사결정에 참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의사결정 절차 갈등은 기금운용위가 투정위 절차를 패스하려다 시작된 것으로 전해진다. 패스의 이유는 대충 짐작이 간다. 결국 투정위를 거치기는 했으나, 전문위원들의 반발로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하자, 다른 위원회 위원을 대리참석시켜 통과시켰다. 의결정족수 미달에 따른 대리참석은 복지부가 결정했다.

기금운용본부의 조직 붕괴는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자본시장 밸류체인의 최상단인 국민연금이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투자 운용역들이 국민연금을 떠났고,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논란을 거치며 이탈이 빨라졌다.

이젠 주니어 운용역조차 제대로 채용하지 못해 채용 자격인 투자 실무 경력 요구를 하지 않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금운용직은 그동안 경력자만 채용했다. 국민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일엔 주니어라도 전문가로서의 경력을 당연한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 정도면 투자 기업의 거버넌스가 아니라 자신의 거버넌스를 먼저 돌아봐야 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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